자면서 듣기 좋은 성경이야기
창세기 16-21장, 갈라디아서 4:21-31, 로마서 9:6-8 · 성경으로 읽는 세계사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 갈라디아서 4:28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 그 약속을 받던 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처음 몇 년은 믿음으로 기다렸겠죠. 사막의 별들을 바라보며 '저 별처럼 많은 후손'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요. 그런데 해가 가고 또 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라의 나이는 이제 일흔이 넘었고, 아브라함은 팔십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그들은 가나안 정착민 사이에서 이방인이었고, 자녀도 없었고, 여전히 텐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 텐트 문을 열고 별 하늘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눈에 어떤 빛이 담겨 있었을까요. 믿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조금씩 스며드는 의구심이었을까요.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뭔가를 놓친 건 아닐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마음은 그 틈을 메울 무언가를 찾기 시작합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는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으로는, 여주인이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들여보내 대를 잇는 일이 흔했습니다. 법적으로도 용인된 관습이었어요. 사라는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자녀를 주지 않으셨으니, 내 여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씨를 이어야겠다.' 그것이 악한 의도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라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이루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 겁니다. 아브라함도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그 역시 오랜 고민 끝에 동의했겠죠.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계획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천사를 보내서 '잠깐, 그러지 마라' 한마디 하실 수도 있었는데. 왜 침묵하셨을까요. 이 질문은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잠시 후에 꼭 돌아오겠습니다.
하갈은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임신이 확인되자마자 텐트 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하갈의 눈에 사라가 가볍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수십 년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던 여주인, 그런데 자신은 단번에 임신에 성공했으니까요. 그 교만은 태도로 드러났고, 사라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몰아붙였고, 아브라함은 '당신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뗐습니다. 사라의 학대에 하갈은 결국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혼자서요. 그런데 거기서 하갈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약속을 주셨어요. '네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스마엘.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버리신 아이였을까요? 하갈에게 천사가 나타나셨다는 것,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 더 가봅시다.
아브라함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더 구체적이고 더 확실한 약속이었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내년 이맘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백 살 된 사람이 자녀를 낳는다고요? 사라도 텐트 뒤에서 듣다가 속으로 웃었죠. 하지만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사라는 말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쁨이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웃음'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열네 살쯤 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모습이 사라의 눈에 띄었습니다. 사라는 그 순간을 보고 폭발했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이 아이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것은 단순한 가정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도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14년을 함께 키운 아들이었어요. 이 결정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얼마나 무너뜨렸을지, 창세기는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심히 근심이 되었더라'는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말하는 대로 하라.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하갈의 아들도 내가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니, 그도 네 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빵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고 아이와 함께 보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 하갈은 아이를 수풀 아래 두고 멀리 떨어져 울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불렀습니다. '하갈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아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그리고 눈이 열려, 우물이 보였습니다. 아까 우리가 던진 질문, 기억하시나요?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아이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절망의 끝에서도, 하갈과 이스마엘의 울음을 들으셨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괜히 '하나님이 들으셨다'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왜 하나님이 사라의 계획을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제 윤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강제로 막으시기보다, 그 선택의 결과 속에서도 함께 계시며 선으로 이끄십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자랐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되었고, 애굽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했다고 기록하며,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스마엘을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도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라비아로 퍼져나갔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이삭의 후손은 가나안에 남아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고,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라비아로 퍼져 다양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한 텐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두 갈래 강이 되어,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간 겁니다.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두 갈래 이야기는 두 민족이 되고, 두 종교가 되고, 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두 줄기는 전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땅에서 매일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오늘의 중동 전쟁은 하나님의 뜻인가요? 이 갈등이 성경에 예정된 불가피한 운명인가요? 이 질문에 성경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답을 줍니다.
이란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고대 페르시아어로 '아리아인의 땅'을 뜻합니다. 페르시아, 즉 오늘날의 이란은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고레스 왕이 유대인 포로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그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이스라엘은 한때 우호적인 관계였어요.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나고, 페르시아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페르시아인은 아랍 민족과 다른 계통이지만, 이슬람을 공유하면서 이스마엘의 신앙적 유산과 연결되었고, 이스라엘과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말을 국가 정책처럼 표명해왔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핵 개발, 이스라엘의 군사 대응, 미국의 중재,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갈등이 4000년을 흘러, 이제는 핵전쟁의 위기를 논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이 흐름 속에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하갈과 사라를 두 언약의 비유로 사용합니다. 하갈은 시내산 언약, 곧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는 약속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갈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난 자, 사라에게서 난 자는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설명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아랍 민족은 열등하고 유대 민족은 우월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민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신앙'과 '약속을 믿는 신앙'을 대비하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서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체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겨진다.' 혈통이나 민족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대인 중에도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랍인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물었죠. 오늘의 중동 전쟁은 하나님의 뜻인가요? 이제 그 질문의 답에 다가가 봅시다.
중동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질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조급함이 빚어낸 갈등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흘러가고 있을 뿐, 하나님은 어느 한 편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유대 민족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문제이듯, 이슬람 극단주의도 같은 방식으로 문제입니다. 양쪽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 해서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듯, 어떤 민족도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갈의 눈물도 들으셨던 분입니다. 오늘 가자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도, 텔아비브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이도, 테헤란 거리에서 평화를 원하는 시민도, 하나님은 그 모두를 보고 계십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가 곧 성경의 이스라엘과 같다거나, 현대 아랍 민족이 성경의 이스마엘과 동일하다는 단순한 등치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약속의 자녀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아랍인도 이란인도 한국인도 모두 하나님의 약속 안에 초대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느 편이 옳은지 판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해,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족장들의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라의 조급함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조급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하면서도 기다림이 길어지면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그 마음. 사라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갈을 들여보낸 것이 악의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을 인간이 앞서려 할 때, 그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왜 사라의 계획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창세기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강제로 막으시기보다, 인간이 스스로 배우고 그 결과를 통해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은 양쪽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사라의 고통도 보셨고, 광야를 헤매는 하갈의 눈물도 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과 로마서 9장은 이 이야기를 영적인 렌즈로 해석합니다. 약속의 자녀란 민족이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특정 민족의 독점 재산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은 온 인류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며 어느 편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판단하기 전에, 이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한 편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스마엘도 들으셨던 하나님, 하갈을 광야에서 만나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그 땅에서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보고 계십니다. 극단적 종교주의는, 유대인이든 이슬람이든 기독교인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해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부름은 판결자가 아니라 기도자입니다.
하나님, 4000년 전 광야에서 하갈의 울음도 들으셨던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중동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이란에서, 두려움과 슬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세요. 우리가 이 갈등을 바라볼 때 판단하는 마음보다 먼저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고, 어느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라도, 하갈도, 이삭도, 이스마엘도 품으셨던 하나님, 그 넓은 사랑으로 이 땅을 덮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